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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그 겨울의 질화로

- 코로나 19로 힘들어 하시는 분들께 위안과 희망이 되었으면

며칠 전 답답한 마음도 달랠 겸 충북 옥천에 다녀왔다. 집에서 세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옥천 읍내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옥천에 오면 항상 정지용 시인이 생각난다.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로 향했다. 생가는 읍내 한복판에 있었다. 초가로 된 생가 옆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생가 옆의 문학관은 못 들어 가봤지만 시 ‘향수’가 되살아나면서 시린 마음이 문득 따뜻해졌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시인은 고향의 정서를 이렇듯 따듯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의 어린 시절도 그렇지만 시인이 살았던 그 시대에 질화로는 겨울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질화로를 보면 언제나 고향의 겨울이 떠오르고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부르며 달려오시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 나이 어느덧 50대 중반, 질화로에 얽힌 추억 한 자락을 끄집어내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려니 기억 속에 꼭꼭 숨어 있던 추억이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으니 어느덧 30여 년이 지난 얘기다.

 

저 7, 80년대를 살아본 분들은 알겠지마는 그 시절의 겨울은 혹독했다.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날이 예사였고 눈도 허리께를 덮을 만큼 푸짐하게 내렸다. 쌓인 눈이 녹기도 전에 다시 내려 쌓이고 또다시 쌓여서 거대한 눈 왕국이 되었다. 참으로 겨울다운 겨울이었고 눈다운 눈이었다. 근래 들어 도시에 찔끔 내리는 5센티미터 안팎의 눈은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만지면 쩍쩍 달라붙었고 처마 아래 고드름은 며칠이고 매달려 있었다. 그런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질화로와 군불이 필수였다. 아궁이에 군불을 충분히 때서 안방 아랫목과 사랑방을 따끈따끈하게 데워놓아야 마음이 놓였다.

 

저녁나절, 아버지는 헛간에 쌓아둔 청솔가지와 장작을 쑤셔 넣고 군불을 땠다. 아궁이에서 탁, 탁 잘도 타는 군불을 바라보며 흡족해 하시던 아버지. 아궁이 고래를 타고 들어간 열기는 안방과 건넌방을 따듯하게 녹여놓았다.

 

흙과 돌로 지은 집이다 보니 맞바람이라도 불면 굴뚝으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매캐한 연기가 부뚜막 틈이며 아궁이로 역류해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워야 했다. 부엌을 가득 덮은 연기 때문에 연신 콜록콜록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연기가 사라지면 평온이 찾아왔다.

 

솥에서는 여물이 자글자글 끓고 있었고, 밥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솥뚜껑 틈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면 밥이 다 돼 간다는 신호였다. 어머니는 행주로 부뚜막이며 무쇠솥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사발에 밥을 퍼 담을 준비를 하셨다. 마구간에서 여물 냄새를 맡은 암소는 어서 밥 달라는 눈빛이다.

 

한없이 착한 눈빛으로 나를 둠벙둠벙 바라보던 암소! 저 세상에서 잘 살고 있을까? 매번 새끼를 낳아 우리 가족을 기쁘게 했던 암소는 우리 집 재산목록 1호였다.

 

아버지는 송아지를 팔아 내 학비를 대셨고 가정살림에 보탰다. 땅 한 뙈기 없이 소작으로 농사를 짓다보니 늘 가난에 찌들어 살았지만 잘도 커가는 암소와 송아지를 보면 마음이 든든했다. 어쨌거나 그날 저녁 밥상에 올라온 하얀 쌀밥과 고등어구이, 그리고 몇 가지 반찬과 된장국은 정말이지 일미(一味)였다. 한 시절의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고 세월도 강물처럼 흘러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아름다운 추억이었고 따스한 삶의 온기로 남아 있다.

한파가 매섭게 몰아치는 날에는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세 번 군불을 지펴야 했다. 온돌방을 달군 열기는 이른 아침까지 남아 있게 마련이어서 아무리 추운 날에도 거뜬하게 하룻밤을 날 수 있었다. 군불을 지피고 난 다음 타고 남은 벌건 불씨를 질화로에 옮겨 담는 일은 내 몫이었다. 불에 타고 남은 재를 퍼내고 그 자리에 새 불씨를 부어놓으면 어머니는 석쇠를 올려놓고 생선을 굽거나 찌개를 끓였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밤, 화롯가에서 듣는 아버지의 으스스한 옛날 얘기는 또 얼마나 정겨웠던가.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이따금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면 등잔불이 꺼질까봐 손으로 불을 가리곤 하셨다. 부어엉, 부어엉…. 밤이 깊으면 집 앞산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한밤의 정적을 깨우는 그 소리가 나는 싫지 않았다. 이따금 문풍지를 울리는 솔바람소리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우우, 하는 그 소리는 새벽녘까지 계속되다 먼동이 트면서 잦아들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소리가 마음 한 구석에 옹이처럼 남아 있다. 사르락 사르락 차르르 차르르-. 솔바람 소리에 섞여 들리던 싸락눈 내리는 소리도 마음 한 구석에 진하게 남아 있다. 타향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내게 문득 그려보는 그 겨울밤 자연의 소리는 고향이 부르는 소리다. 코흘리개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며 마구간 암소와 강아지가 부르는 소리다.

 

질화로에는 한 쌍의 부젓가락 혹은 인두가 꽂혀 있기 마련이었다. 부젓가락은 불씨를 헤치거나 간혹 떡을 구울 때 요긴하게 쓰였다. 부젓가락 두 개를 적당한 간격으로 벌리고 그 위에다 인절미나 절편을 올려놓고 구우면 그 구수한 냄새에 정말이지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세모꼴 모양의 인두로는 밤이나 고구마를 묻어 굽기도 하고, 옷 팔소매나 저고리 앞 동정을 반듯하게 다려 펴기도 했다. 후자는 언제나 어머니가 떠맡았다. 놋다리미가 있었지만 다리미가 닿지 못하는 부분은 인두질이 그만이었다.

 

문명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고 사는 요즘 세대들에게는 실감이 안 날 테지만 나이 지긋한 쉰 살 안팎의 중 장년 세대들에게 화롯불은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즘은 시골에 가도 기름보일러 아니면 전기보일러가 난방을 대신하고 있다. 간혹 군불을 때는 집이 있긴 하지만 보기가 쉽지 않다. 아궁이는 연료통으로 바뀌었고 땔나무는 석유와 가스로, 질화로는 전기난로가 꿰찼다. 문명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시대, 사라져가는 것들이 아쉽기만 하다.

 

아랫목에 대한 추억도 사라져가고 있다. 어린 시절, 바깥에서 놀다 들어오면 으레 아랫목을 찾게 마련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 없다. 아랫목 이불 밑에 언 손을 넣고 한참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언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면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곧 겨울이 온다. 질화로에 고구마 구워먹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 그 추억은 불씨처럼 되살아나 삶에 지쳐 풀죽어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곤 한다. 강물처럼 흘러가버린 유년시절이지마는 추억의 힘은 강해서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좌절과 번민을 잠재운다.

온돌방 한켠에 놓여있던 질화로가 자꾸만 생각나는 이즈음이다. 삶이 힘들고 고단할 때 고향은 나를 따듯이 품어 안는다.